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경훈각 (문단 편집) === 조선시대 경훈각의 모습 ===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동궐도 경훈각.png|width=100%]]}}}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경훈각 의궤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 《동궐도》에서 묘사한 경훈각 '''}}} || {{{#gold ''' 《창덕궁영건도감의궤》에 실린 경훈각 '''}}} || 《[[동궐도]]》에 따르면, 정면 5칸, 측면 4칸의 1층으로 [[지붕]]은 팔작지붕에 중층이었고 [[청기와]]를 올렸다.[* 앞서 말했듯이 원래 [[인경궁]]의 [[정전]]이었기 때문.] 겹처마 [[양식]]으로 지었고, [[암석|장대석]]을 높게 쌓은 4단의 [[기단]] 위에 [[주춧돌]]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네모난 [[기둥]]을 세운 뒤, 쇠서[* [[소]] [[혀]] 모양의 부재.] 2개에 이익공 [[공포]]를 놓고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(長花盤)을 놓아 침전 건물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. 지붕의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 바름을 하고 용두와 [[잡상]]으로 장식하였다. 5칸 중 가운데 칸은 [[건물]]을 드나들 수 있게끔 [[마루|툇마루]]를 밖으로 돌출시켰다. 마당에는 [[우물]]이 있어 언제든 마실 수 있게 하였다. 서쪽에는 부속건물인 옥화당과 영휘당을 두었는데 둘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며, 한 건물을 두고 위치와 용도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. * 실내에 대한 [[기록]]은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. 다만 《동궐도형》을 보면 [[온돌|온돌방]] 하나와 [[대청]] 둘이 각각 정면 1칸, 측면 2칸의 규모로 있었고 남북으로 공간을 터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. 그리고 [[방]]과 [[대청]]의 가장자리를 툇간이 감싸는 형태로 되어있었다. 그리고 서쪽 측면에 정면 1칸, 측면 4칸의 [[누]][[마루]]를 두었으며 누마루의 남쪽엔 정면 1칸, 측면 1칸의 창고를 3개 씩 놓았다. 누마루의 서쪽이 바로 경훈각의 부속건물인 영휘당과 옥화당인데 이 둘은 같은 건물로, 동쪽 방이 영휘당, 서쪽 방이 옥화당이다. 둘을 합쳐 볼 때 정면 6칸, 측면 2칸으로, 제일 서쪽의 정면 4칸, 측면 2칸은 [[방]]으로만 되어있고 툇간이 없으나 그 동쪽에 있는 정면 2칸의 마루와 정면 2칸의 온돌방 앞엔 툇간이 있었다. *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조선 말기 창덕궁 경훈각.jpg|width=100%]]}}}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907 ~ 1917년 이전 창덕궁 경훈각과 징광루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gold ''' 조선 말기 촬영한 경훈각과 징광루 '''}}} || {{{#gold ''' 일제강점기 순종이 살던 당시 경훈각과 징광루 '''}}} || [[조선시대]] 경훈각의 형태를 볼 수 있는 [[사진]]이 현재 두 장 남아있다. 왼쪽의 사진은 주변이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]]이 [[창덕궁]]으로 [[이어]][* 移御. [[임금]]이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. 쉽게 말해 [[왕]]이 [[이사]]가는 것이다.]하기 전에 찍은 것이나 정확한 촬영일자는 불명이며, 오른쪽은 1912년 [[일제강점기]]에 촬영한 것이다. 두 사진이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나 오른쪽 사진의 경훈각 내부를 보면, [[창문]]에 [[유리]]를 달았고, 내부에는 [[커튼]]까지 설치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